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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희망 (Hope) 본문

단편식 자작 소설/정규 자작 소설

39 희망 (Hope)

CPSpeed 2025. 7. 1. 07:00

그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혼자 사는 유대인입니다. 잔혹한 ㅎㅅ이 ㅈㅎ된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생존자 중의 한 명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기차는 폴란드에 있는 아우슈비츠로 갔습니다. 삼엄한 감시와 죽음의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 유대인 수용소. 그곳은 마치 유대인을 위한 지옥과도 같은 곳이였습니다. 나치 군인들은 유대인들의 옷을 모두 벗기고 서 있게 하였습니다. 그것도 남녀노소가 모두 나체로. 유대인은 아우슈비츠에서는 짐승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입에 담을 수 조차 없는 모욕과 멸시가 그들을 괴롭혔습니다.

 

묽은 수프 한 접시와 완두콩 한 알로 끼니를 떼우고 중노동에 시달리는 나날. 절망한 동료들은 날마다 쓰러지고 무너지고 죽어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달랐습니다. 언제나 강인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쓰러진 동료들을 일으켜 세우고 힘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그가 절망 대신 희망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원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쉬는 시간마다 일기를 쓰면서 자신의 후손들에게 이런 끔찍한 시절의 고통을 알려주기 위해서 입니다. 일기장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도록 물건 간수를 철저히 하며 꼭 몸에서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일기장을 세계 사람들한테 들려주기 위해 사람들이 그런 고통을 겪지 않도록 교훈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몇번이나 학살의 위기가 있었지만 그는 운이 좋았습니다. 다행히 학살의 위기에서 피한 것입니다. 자신의 일기장을 세계 곳곳에다가 들려주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의 희망이 조금씩 강하게 회복시켜준 것입니다. 일기장을 바라보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벗어나는 날이 오기를 빌면서 희망은 강해졌습니다.

 

그렇게 풀려난 이후.

- 주인공 : 해냈다. 희망 덕분에 살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눈 앞에 불행에 절망하느라 희망을 놓아버리는 대신. 한 가지 목표에 희망을 넓혀가며 그것이 그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일러 주었던 것입니다.

 

살아남은 그는 일기장을 들고 자신이 살던 폴란드의 있는 집을 팔아 벨기에 브뤼셀로 이주하여,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가 아우슈비츠에 갇혀서 절망 대신 희망을 넓혀 살아가는 희망을 가지며 써놓은 그의 일기는 앞으로도 세계적으로 삶의 교훈을 주는 고귀한 작품이 될 것입니다.

 

<아유슈비츠 강제 수용소

독일어: Konzentrationslager Auschwitz

영어: Auschwitz concentration camp

문화어: 오슈벵찜수용소>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하여 만들었던 강제 수용소로, 폴란드의 오시비엥침에 있는 옛 수용소입니다. 위치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약 300km 떨어진 곳이며, 좀 더 가까운 크라쿠프에서는 서쪽으로 약 70km 떨어져 있어요. 이곳에서 처형된 사람들은 유대인·소련군 포로·장ㅇ인·동ㅅㅇ자·반나치주의자들이었습니다. 나치가 세운 강제수용소 중에서 최대 규모이며 백만명 이상이 ㅅㅎ당했습니다. 원래는 폴란드군의 병영이었으며 수용소의 건물들도 수용소 생성 후 새로 지어진 건물들 이외에는 전부 폴란드군 벽돌 막사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전체 28동으로 되어 있습니다.

 

1945127일 소비에트 연방의 붉은 군대의 진주로 인하여 해방되었습니다. 1947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설립되었으며, 1979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수감 시설>

수감 시절은 매우 좁은 크기의 방에서 생활했습니다. 이 방은 너무나 좁아서 일어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최초의 수용자들이 아우슈비츠에 온 것은 19406월로, 폴란드 양심수 728명이 첫 수용자들이었습니다. 이후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폴란드인 수용자들은 약 15만 명이며, 이중 75천 명이 죽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학살>

19419, 소련군 포로와 유대인 수용자들이 처음으로 독가스실에서 학살당한 것이 아우슈비츠에서의 첫 학살이었습니다. 한 번에 약 2,000여 명의 수용자가 학살당했습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노동력이 없는 노인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들이었는데, 수용소 도착 즉시 선별되어 보내졌어요. 독가스실은 대개 샤워실의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나치는 학살 피해자들에게 샤워를 하라고 하여 옷을 벗게 한 뒤, 가스실에 보내어 학살하였습니다. 사용된 독가스는 효과가 빨리 나타나는 치클론 B였는데, 제조사인 회흐스트 주식회사는 전후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 가담 전과 때문에 도덕성에 상처를 받았죠. 학살 피해자들의 시체는 시체 소각로에서 대량으로 불태워졌는데 하루에 약 1,500구에서 2,000구까지의 시체가 소각되었고, 이들의 옷과 신발은 분류되었어요. 또한 수용자들의 머리카락을 잘라 카펫과 가발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나치의 만행은 현재 독일 역사교과서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습니다.

 

<희생자 수>

기존에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 사람은 약 400만 명이며 이 중에서 약 250만 명이 유대인이라고 알려져왔어요. 처음에 이 수용소를 해방한 옛 소련군의 발표였어요. 그러나 이 숫자에 대한 반론도 있다. "과장되고 꾸며낸 얘기가 많다"는 제목으로 씌여진 뉴스위크지 1995118일 자의 기사[9]에 의하면,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사람은 유대인을 포함하여 110~ 150만 명으로 추산했으며, 가장 많은 희생자가 유대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정확하게 몇 명이나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죠. 유태인 외에 나머지 희생자들은 폴란드 양심수, 나치에 저항한 동유럽 슬라브족, 동유럽인들과 옛 소련군 포로 (주로 정치장교), 집시민족 등이었습니다. 이어 2005년 아우슈비츠 해방 60주년 행사를 알리는 기사에서는 유태인 희생자 수를 100만 명으로 쓰고 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당한 러시아인, 동유럽인들은 30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 됩니다.

 

[결론]

제가 만약 유대인으로 태어났으면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아우슈비츠로 끌려가서 모진 고문이나 ㅎㅅ을 당하고 말았어요. 저는 1997년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을 감사하겠습니다.

 

이제 다음 편이면 저의 목표 분량의 절반이네요. 여러분, 40편에서 다시 만나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