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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가정교사의 작은 선물 (Tutor and the Little Present) 본문

단편식 자작 소설/정규 자작 소설

20 가정교사의 작은 선물 (Tutor and the Little Present)

CPSpeed 2025. 5. 30. 16:52

[1문단]

베트남 다낭의 어느 장례식장에서.

아줌마 1 : 아들이 아직 12살 밖에 안됐다며?

아줌마 2 : 그런가봐요. 그 아이 누나도 겨우 14살이라던데. 그 애들 어떻게 살아요.

아줌마 3 : 불쌍해라.

2007년 9월, 부모님은 나와 누나를 남기고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당시 아직 어린 우리 남매에게 부모님은 큰아버지(아버지의 형=삼촌)에게 부탁한다며 마지막 길까지 눈물을 지으셨다.

아버지 : 형, 우리 자식들을 잘 부탁해!

어머니 : 얘들아, 큰아버지 말씀 잘 듣고 착하게 살아야한다.

남겨진 건 부모님과의 행복한 추억과 부모님의 결혼식 사진 한 장. 부모님은 사진 속에서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입고 행복한 모습으로 지내시고 있었다.

우리는 큰아버지 밑에서 부모님의 유언대로 말 잘 듣고 착하게 살았다. 하지만, 우리는 큰아버지 집에 온 이후로 성적이 점점 떨어졌다. 부모님을 잃고 실망한 나머지 공부와 숙제를 미루고 거의 놀기만 했다.

큰아버지는 이에 실망하였다.

 

[2문단]

2009년 2월. 큰아버지는 어떤 아주머니를 집 안으로 데려오셨다.

큰아버지 : 애들아 나와라.

큰아버지 : 오늘부터 너희 가정교사 될 분이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렴. 알겠지?

우리의 성적을 향상 시키지 위해 가정교사를 데려오신 것이다. 하지만 우린 공부가 싫었다. 결국 생전처음 겪어보는 큰아버지의 매 타작이 시작되었다.

큰아버지 : (대나무자로 주인공 아들의 등짝을 매질을 하며) 그 분이 너희 엄마 되려고 한 분이야? 너네들 저질 같은 성적을 올리려고 모셔온 선생님이야?

누나 : 서 선... 생.. 님.

누나는 어색하게 선생님이라고 겨우 목소리를 내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지만 난 절대로 공부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도 싫었다. 왠지 부모님과 훈훈하게 공부하던 시절이 더 그리워서 공부가 재미없어졌기 때문에.

등짝이 대나무자로 맞고 빨갛게 달아오를수록 난 입을 꾹 다물었다.

가정교사 : 고정하세요, 아버님. 자꾸 왜 어린 남자아이를 때려요? 난 괜찮으니까 남자애 좀 그만 아프게 해요. 부탁드립니다!

가정교사의 말림으로 인해 매 타작은 끝이 났지만, 어느새 가정교사 선생님에 대한 적개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큰아버지 : 언제까지 돌아가신 부모님 사진만 붙들고 그럴래? 가정교사 선생님은 불쌍하지도 않느냐?

큰아버지는 공부를 안하고 돌아가신 부모님 타령만 한다면서 부모님 사진을 압수해버리셨다. 부모님 결혼 사진 때문에 내가 가정교사 앞에서 공부를 등한시 하는 거라는 이유였다.

이때부터 가정교사한테 본격적으로 불친절하게 대하게 시작되었다.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가정교사는 분명 선량한 분이었다. 그러나 한 번 타오리기 시작한 적개심은 그 착함마저도 위선으로 보일 만큼 강렬했다.

난 가정교사의 수업을 끝내기도 전에 그만두고 밖에서 나가 놀았다.

 

[3문단]

2009년 10월. 바나힐로 수학여행을 갔다. 그때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가정교사에 대한 반항으로 인해 안좋은 성적 때문에 큰아버지한테서 용돈을 조금 밖에 못 받았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이 되고 모두들 뷔페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 나는 돈이 조금 밖에 없어서 뷔페에서 먹지 못했다. 그렇게 밥도 못 먹고 투덜대던 내 눈에 가정교사가 들어왔다. 손에는 60만 동(한화 3만2천원)의 돈이 들려있었다.

아마 뒤늦게 이웃집 아잉 느(Anh Nữ) 아빠한테서 현장 학습이라고 전해 듣고 60만 동을 챙겨오신 모양이었다.

나는 절대 고맙다고 한 마디 안하고 60만 동을 낚아채서 가정교사로부터 도망쳐버렸다.

가정교사 : (Dức).. 득쭝(Dức Trung).

도망친 지 약 100미터 지점에서 가정교사는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 무릎을 꿇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고 계셨다. 나는 절대 불쌍한 마음이 조금도 없이 더 멀리 뛰어갔다.

 

[4문단]

가정교사를 경계와 증오하면서 살던 학창 시절을 보내고, 어느 새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2014년 8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가정교사와 큰아버지로부터 회사원이 되라고 명령했지만.

득쭝 : 큰아빠, 전 회사원이 되기 싫어요.

가정교사가 원하는 대로 하기 싫었고 하루라도 빨리 독립하고 싶었다. 독립하면 다시는 가정교사 면상을 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결국 내 고집대로 동화책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2014년 11월 30일, 호치민에서 동화작가 프리랜서로 취업을 시작했다. 드디어 그 날이 오고 가방을 꾸리는데 가정교사가 편찮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가정교사를 만나지 않으리라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5문단]

호치민에서 자취하면서도 한 달이 되도록 가정교사한테 연락 한번 하지 않았다. 동화 작가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낯섦이 조금씩 익숙해져 갈 무렵 옷 가방을 정리하는데, 트렁크 가방 맨 아래 검은 비닐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득쭝 : 누군가 내 가방 속에 넣어놓은 비닐봉투을 넣었을까? 한 번 열어볼까?

봉투 속에는 볼펜 6자루와 공책 3권, 드로즈 두 벌과 긴소매 티셔츠 한 벌이 들어있었다.

득쭝 : 가지런한 글씨체. 누구지? (깜짝 놀람) 어.

비닐봉투를 넣어준 사람은 가정교사였다. 두 번을 접은 편지지 안에는 놀랍게도 큰아버지가 압수한 부모님의 결혼식 사진이 들어있었다.

가정교사 : 쭝둥(Trung Dũng,득쭝의 큰아버지 이름) 님 몰래 이 사진을 득쭝한테 보내면 그 아이도 나한테 마음을 열거야.

가정교사는 부모님의 결혼식 사진을 쭝둥 삼촌(큰아버지) 몰래 간직하다가 편지지 속에 넣어서 내게 보내 준 것이다. 나는 가정교사한테 경계심을 한 것이 진심으로 후회되어 당장 지난 일에 대해 사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6문단]

내가 데뷔작으로 쓴 동화책이 히트를 쳐서 첫 월급을 탄 날 - 2015년 4월 19일. 난 다낭행 버스를 탔다.

다낭행 버스에서는 마음 속의 천국이 보였다. 큰아버지, 돌아가신 부모님, 그리고 가정교사의 작은 선물.

가정교사 선생님, 아니 헌 프엉(Hân Phương) 씨는 자신이 새로 구입한 집 앞에서 나와 날 기다리고 계셨다.

청소를 마치고 땀을 흘린 헌 프엉 씨는 기쁜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

득쭝 : 헌 프엉 씨. 옛날에 많이 속썩여서 죄송해요. 지금도 선생님이라도 불러도 되나요?

헌 프엉 씨는 나를 반기며 말했다.

헌 프엉(가정교사) : 아니, 나 이제 너네 가정교사 그만뒀어! 그냥 헌 프엉 씨라고 부르렴.

득쭝 : 네, 헌 프엉 씨. 이제부터는 작은 선물처럼 따뜻하고 친절하게 모시겠습니다.

헌 프엉 씨는 그 말에 나를 인정하며 말했다.

헌 프엉 : 이제 나는 너네 큰아버지 집의 근처에 있는 이 새 집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면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단다. 만약 갈 곳이 없으면 언제든지 우리 집에 놀려오렴.

헌 프엉 씨는 이미 가정교사를 그만 두었지만, 우리한테는 절대 잊을 수 없는 중요한 분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