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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식 자작 소설/정규 자작 소설

49 몽유병에 걸린 남자 (Sleepwalking in the dark)

CPSpeed 2025. 12. 25. 05:00

2012년 12월, 영국 스코틀랜드, 인버네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잔혹했다. 북해의 습기가 얼어붙어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가 인버네스(Inverness)의 자갈길과 빅토리아풍 건물들을 온통 흰 서리와 눈으로 뒤덮었다. 하이랜드의 수도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새벽 두 시의 거리는 인적 없이 오직 강물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클래치나하리(Clachnaharry) 지역의 작고 오래된 테라스 하우스. 2층 침실에는 알리스테어 맬컴 매클라우드(Alistair Malcolm MacLeod), 스물세 살의 젊은 스코틀랜드 남자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모든 옷을 벗고 자는 버릇이 있었고, 두꺼운 오리털 이불 덕분에 그 혹한 속에서도 따뜻한 꿈을 꾸고 있었다.

시계가 새벽 2시 17분을 가리켰을 때였다. 알리스테어는 조용히 눈을 떴다. 그러나 그 눈에는 의식의 빛이 없었다. 그는 몽유병 상태였다. 천천히 이불을 걷어낸 그는 벌거벗은 채로 차가운 마룻바닥에 두 발을 디뎠다. 그의 피부는 고대 그리스 조각상처럼 완벽했지만, 그 위로 소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문을 열고 복도를 지나 1층으로 내려갔다. 낡은 현관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고, 알리스테어는 영하 10도를 밑도는 인버네스의 겨울밤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눈 덮인 거리로 나선 그의 모습은 덧없는 인간의 나약함 그 자체였다. 그의 발은 눈 위에 희미한 맨발 자국을 남겼다. 그는 마치 북쪽을 향해 이끌리는 것처럼, 도심과 네스 강(River Ness) 방향으로 걸어갔다.

차가운 공기가 그의 폐를 찔렀고, 곧 그의 피부는 보라색으로 변하기 시작했지만, 알리스테어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오직 몽유 상태에서만 가능한 완벽한 무의식 속에서 걷고 있었다. 그는 도시의 중심인 교회(Old High Church) 근처를 지나, 고요히 흐르는 네스 강변의 퀸즈 파크(Bught Park)로 접어들었다.

바로 그때, 어둠 속에서 네 개의 형체가 서서히 나타났다. 그들은 달빛 아래 희미하게 빛나는, 차가운 푸른빛을 띠는 여자들의 유령이었다. 각자 다른 시대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모두 깊은 한(恨)과 슬픔을 담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첫 번째 유령은 18세기 하이랜드 여성의 낡은 격자무늬 의상을 입고 있었고, 두 번째는 빅토리아 시대의 무도회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세 번째는 1940년대의 단정한 군복 차림이었으며, 네 번째는 놀랍게도 2000년대의 평범한 현대 의상을 하고 있었다.

이 네 명의 여자 유령은 알리스테어를 보자마자 멈춰 섰다. 그들의 눈동자가 증오와 분노로 타올랐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주변의 온도를 더욱 급강하시켰다.

"저 남자야." 18세기 유령이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이 깨지는 듯 날카로웠다.
"그래, 저 비겁한 눈빛. 내가 마지막으로 봤던 그 모습 그대로군." 빅토리아 시대 유령이 조롱하듯 말했다.
"그가 우리를 버렸어. 약속을 어기고, 우리를 홀로 남겨두었지." 1940년대 유령이 격분했다.
"이제 끝내야 해. 그를 강물 속으로 보내야 해." 현대 유령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들은 천천히, 마치 안개가 움직이듯 알리스테어에게 다가갔다. 그들의 손길은 물리적인 접촉 없이도 주변 공기를 얼려버릴 수 있었다.

몽유병자인 알리스테어는 네스 강변을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이제 그는 강물 바로 옆, 돌로 된 난간을 따라 걷고 있었다. 유령들은 동시에 움직였다. 18세기 유령은 알리스테어의 발목을 얼리려 했고, 빅토리아 유령은 그의 심장을 조이려 했다. 1940년대 유령은 그의 뒤에서 그를 강물 쪽으로 밀어내려고 했고, 현대 유령은 그의 입술에서 마지막 호흡을 앗아가려 했다.

알리스테어는 비틀거렸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그의 벌거벗은 몸은 강추위와 유령들의 초자연적인 냉기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공허했다. 그는 강물에 반쯤 걸친 채 멈춰 섰다.

죽음이 코앞에 닥친 순간, 1940년대 군복 차림의 유령이 알리스테어의 오른쪽 어깨에 손을 대려다가 멈칫했다. 그녀의 차가운 손이 알리스테어의 피부에 닿으려는 찰나,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잠깐..." 그녀의 분노가 희미해지며 혼란에 빠졌다.
"왜 그래, 마가렛?" 18세기 유령이 으르렁거렸다.
"이 문신... 아니, 흉터. 오른쪽 어깨에... 이 모양은..."

알리스테어의 오른쪽 어깨에는 오래된 상처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어릴 적 사고로 생긴 흉터였지만, 그 모양은 하이랜드의 고대 룬 문자와 비슷했다.

"나도 알아... 나도 그 흉터를 봤어." 빅토리아 유령이 숨을 삼켰다. "1870년, 에든버러에서... 그가 군인이었을 때, 나에게 보여줬던 흉터야."

현대 유령은 알리스테어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눈빛은 다르지만... 이 미간의 작은 주름... 이건, 2005년에 나와 함께 코스타리카에 있을 때... 늘 짓던 표정이야."

18세기 유령이 마침내 깨달았다. 그녀의 얼굴에 비통함과 충격이 교차했다.
"그때 그 남자야... 우리 모두가 사랑했던... 하지만 결국은 운명 때문에 떠나보내야 했던 그 영혼."
"우리가 그의 환생을 죽이려 했어." 마가렛 유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들은 이 벌거벗은 몽유병자가 수 세기에 걸쳐, 다른 시대, 다른 이름으로 살았던 그들의 연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리스테어가 이 생에서 그들에게 어떤 잘못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증오와 분노는 수백 년의 상실감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그 분노를 쏟아낼 대상이 필요했던 것뿐이었다.

유령들의 냉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애틋함과 연민이 남았다. 네 명의 여자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더 이상 복수심이 없었다.

"우리가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야 해." 빅토리아 유령이 말했다.

네 유령은 알리스테어의 주위를 에워쌌다. 그들의 푸른빛 몸에서 따뜻한 온기가 흘러나와 알리스테어의 얼어붙은 피부를 감쌌다. 그들은 알리스테어의 맨발이 다시 차가운 눈을 밟지 않도록 공중에 띄워 올렸다.

마치 고대의 수호신들처럼, 네 유령은 알리스테어의 몸을 부축하여 네스 강변을 따라, 그리고 자갈길을 거슬러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들은 알리스테어의 이마에 마지막 입맞춤을 남겼다. 그 입맞춤은 차갑지 않고, 오히려 왠지 모를 슬픈 안도감을 주었다.

그들이 현관문을 열고 알리스테어를 조용히 침실로 데려갔다. 18세기 유령은 이불을 펴고, 빅토리아 유령은 그를 침대에 눕혔다. 마가렛 유령은 그의 몸을 닦아주고, 현대 유령은 이불을 목까지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잘 자요, 알리스테어." 네 유령은 동시에 속삭였다. 그 소리는 바람 소리처럼 희미했지만,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동이 트기 시작하는 시간, 인버네스 성(Inverness Castle) 위로 희미한 새벽빛이 번졌다. 네 유령은 그 빛 속으로 서서히 녹아들 듯 사라졌다.

아침 7시. 알리스테어 맬컴 매클라우드는 격렬한 오한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두꺼운 오리털 이불 속에 파묻혀 있었지만, 몸은 몹시 추웠다. 그는 콧물을 훌쩍이며 몸을 웅크렸다.

"젠장, 감기 걸렸나?"

그는 어젯밤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그의 꿈속에는 네 명의 낯선 여자가 있었고, 그들이 그에게 무언가 간절히 부탁하고 있었다는 희미한 잔상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의 방 안에서 낡은 라벤더 향과 소금기 가득한 바다 냄새가 섞인 듯한 알 수 없는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오른쪽 어깨를 긁적였다. 그곳에는 어릴 적 생긴 희미한 룬 문양의 흉터가 있었다. 알리스테어는 그 흉터의 존재조차 평소에는 잊고 살았다. 그는 이불을 걷고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눈 덮인 인버네스의 거리는 어젯밤의 모든 초자연적인 일을 감춘 채, 평화롭게 빛나고 있었다.

 

49편 끝!